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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7.11.28 와리스 디리
  3. 2007.11.22 스콧 니어링
  4. 2007.11.12 노먼 베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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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수영> '외발수영' 뒤 투아, 女마라톤 16위
Posted by 장돌

와리스 디리

열정적 인물 2007. 11. 28.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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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꽃, 와리스 디리

사막을 건너와 꽃이 된 그녀…‘사막의 꽃, 와리스 디리’ 

○…주말 저녁을 한 여자에 빠져 보냈다.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그 여자를 봤고,커피숍에 앉아 그 여자의 얘기를 들었다. 마지막엔 침대에 누워 그 여자와 함께 울었다.

와리스 디리. 아프리카 소말리아의 유목민 소녀에서 세계적 패션 모델이 된 현대판 신데렐라. 여성 성기 절제라는 참혹한 비밀을 고백해 세계적 인권 이슈로 만들어 내고 유엔 인권 특별대사로 임명된 여성. 와리스의 이야기는 삶을 살만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고,인간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한다.

와리스의 삶을 관통하는 것은 용기이다. 그녀는 맨발로 사막을 건넜다. 13세의 아프리카 소녀가,집 밖으로는 한 번도 나가본 적 없는 미개한 소녀가,새벽 미명을 타고 집을 나와 사막을 질주한다. 아버지가 낙타 다섯 마리를 받고 60대 노인과 결혼시키려는 걸 안 순간 그녀는 목숨을 건 모험을 선택했다.

영어도 못 하고 심지어 버스도 처음 타는 이 소녀는 해도 너무하다 싶은 운명의 손을 통쾌하게 뿌리치며 소말리아를 거쳐,영국으로,뉴욕으로 이동한다. 낙타를 몰고 물을 찾아 떠나던 것처럼. 악마 같은 사내들을 때려눕히기도 하고,여권 위조에 위장 결혼도 거침이 없다. 와리스는 명랑만화의 주인공처럼 도무지 지치는 법이 없고 좌절하는 법이 없다. 아프리카의 태양이 그녀를 그렇게 키웠는지 모른다.

사막을 건너 온 와리스는 뉴욕으로 와서 꽃이 되었다. 가정부 생활을 거쳐 맥도널드 점원으로 일하던 중 유명 사진작가의 눈에 띄어 패션모델로 활동하기 시작한 그녀는 ‘흑진주’ 나오미 캠벨과 함께 수퍼모델로 성장한다. 결혼해서 아기도 낳고 처음으로 집도 가졌다.

그러나 그녀는 패션션계의 수많은 꽃들 중 하나로 머무르지 않는다. 사막을 건너온 그녀는 되집어 사막으로 가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번에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프리카의 여성들을 위해서.

“여인이 면도날을 닦는 동안 엄마는 스카프로 내 눈을 가렸고 눈앞은 캄캄해졌다. 그리고 곧 내 살이 잘려나가는 것을 느꼈다. 무딘 칼날에 쓱싹쓱싹 살이 잘려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느낌을 말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누군가가 허벅지의 살이나 팔을 자르는 듯한 느낌과 비슷하다. 잘려나가는 부분이 온 몸을 통틀어 가장 민감한 부분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와리스는 패션지 ‘마리끌레르’와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여성 할례,즉 여성 성기 절제 수술을 받았음을 고백했다. 끔찍하고 수치스런 아프리카 여성들의 비밀이 와리스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서구사회는 경악했다. 와리스의 고백을 시작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수백만명의 아프리카 소녀들에게 성인식이라는 이름으로 강요하는 할례를 저지하기 위한 인권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와리스의 인생 전체는 원시적 생명력으로 번들거린다. 그 생명력은 단순하고 강인하며 낙관적인 어떤 힘이다. 와리스는 계산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으며 정직하게 반응한다. 어쩌면 그것이 실제 삶이다. 서구인들은 그녀에게 묻는다. “유명해진 기분이 어때요?” 와리스는 이렇게 대답한다. “유명하다니,그게 무슨 뜻인가?”

Posted by 장돌

스콧 니어링

열정적 인물 2007. 11. 22.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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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진정성을 찾아가는 용기있는 영혼 스콧 니어링의 생애


스콧 니어링은 1883년 미국 한 탄광도시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
나, 1983년 생을 마감했다. 1백 세가 되던 1983년, 그는 지상에서
더 이상의 할일은 없다고 판단하고 스스로 곡기를 끊고 지극히 평
화로운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현대 사회의 격변기와
 맞물려 있는 1백 년의 짧지 않은 생애 동안 가장 완전하고 조화로
운 삶을 추구했던 그의 삶이 결코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젊은
시절 그는 열정적인 사회개혁가였고, 자유주의자이자 진정한 의미
에서의 공산주의자였다. 혁명과 전쟁의 시대였던 그 시기는 근본적
으로 평화주의자였던 그를 전쟁의 광기에 대한 강한 비판으로 이끌
었다. 그 때문에 그는 재판정에 서야 했지만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
다 분명하게 자기 의견을 피력하곤 했다. 1945년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을 투하했을 때 그는 강경한 어투로 대통령 트루만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당신의 정부는 더 이상 나의 정부가 아닙니다." 그는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개인적 자유의 수호자 중 한 사람으로 기억될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로 상징되는 문명 전반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가한 사회철학자이자 자연주의자, 실천적인 생태론자로 손꼽힌다.
이러한 선구자적 생각과 단호한 태도 때문에 그는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대학강단에서 쫓겨나고 차츰 강연 요청도 끊겼으며 신문에
기고하는 글조차 거절당했다. 그러던 중 니어링은 스무 살 연하인
매력적인 여성 헬렌 노드(지금은 헬렌 니어링으로 더 잘 알려진)를
 만나 인생을 새롭게 시작한다. 헬렌은 스콧에게 최고의 반려자이자
동지였다. 그들은 함께, 처음에는 버몬트에서 그리고 후에는 메인에
서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적인 생활을 했고 겨울에는 여행을 떠나
고 강의를 하고 저술을 하며 지냈다. 1970, 80년대가 되자 그의 이름
은 차차 사람들 속에 알려져 수많은 사람들이 호숫가 니어링 부부가
 손수 지은 돌집과 그들의 삶을 보러 찾아오곤 했다. 당시 사람들에
게 스콧 니어링은 가난하지만 아무것도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으로,
명석한 몽상가로, 개인적 희생을 개의치 않고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
었다. 당시 그를 향한 존경은 젊은 시절의 화려한 활동 때문이 아니
었다. 그것은 스콧과 그의 아내 헬렌의 자연주의적인 삶의 방식 때문
이었다. 이들의 삶에 감명을 받은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돌아갔다. 함께 농장을 일구는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많은 젊은이들에게도 유기농장에서 감자밭을 가꾸는 이 주름지고 구부정
한, 팔꿈치를 누덕누덕 기운 옷을 입은 괴팍한 노인이 금세기 초 뛰
어난 연설과 강연으로 수천 명을 흥분시켰던 명연설가이자 1917년
반전논문 발표로 스파이 법에 기소되어 연방법정에 섰다는 것을 상
상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저 조그맣고 깐깐한 노인일 뿐이었다. 1983년 8월 24일, 스콧 니어링은 부인 헬렌 니어링이 지켜보는 가운
데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 1백 년의 시간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진정으로 의미있고
충만한 삶이 어떤 것인지를 실천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의 메
시지는 자본주의적 소비문화가 극대화되면 될수록, 우리의 삶이 더
욱 바빠지고 황폐해질수록, 더욱 강력하게 되살아날 것이다.

자유를 찾아가는 인간의 몸짓 스콧 니어링의 사상


일찍부터 그가 가진 관심의 영역과 통찰력은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것들이 많다. 아동노동문제에 대해 아무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
던 때에 <아동노동문제의 해결책>을 출간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
켰고, 여성들에게 선거권이 부여되지 않았던 1912년에 <여성과 사
회진보>를 출간하여 여성들의 사회참여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힌
 바 있다. 또한 흑인을 니그로 등의 경멸적인 호칭으로 부르던 당시
에, 미국 내에서 흑인들이 당하는 폭력을 생생히 묘사한글을 발표
하기도 했고, 1933년 저술한 <파시즘>이라는 책에서는 파시즘을
제약없는 자본주의의 한 형태라고 단언했다. 1917년 미국이 1차세
계대전에 참전하려 할 때 니어링은 <거대한 광기>라는 제목의 논문
을 출간했는데 여기에서 그는 전쟁 기계를 움직이는 역학관계를
상세히 묘사했으며 징집법안을 '비미국적' 이며 '헌법정신과 미국의
전통에 명백히 위반되는 법안' 이라고 비난했다. 1923년 니어링이
 <석유, 전쟁의 씨앗> 이라는 논문을 발간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
은 그 둘 사이의 관계를 인식하지 못했지만 그후 60년 지나 발발한
 걸프전은 그의 통찰력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한 권의 '성서'처럼 와닿는 위대한 생의 자서전


시골에서의 자립농 생활은 그가 추구해 온 사회주의에 대한 실현으
로써 자연주의로 돌아가 인간본연의 모습을 실천적으로 보여준 사
상적 삶이라 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가장 기본적으로 우리가 그의
생애를 뒷받침해 주는 사상을 만나는 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
이다. "모든 계급사회의 밑바탕에는 '네가 일하고 나는 먹는다'는
원칙이 깔려 있다. 이 원칙은 사람들을 결합시키는 대신 뿔뿔이
떼어놓는다……."(본문 중에서)
그는 자본주의의 병폐가 가져다주는 인간파괴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진정한 극복방안을 찾아나선다. 젊은 시기의 사회주의자적인 면모
와 노년의 자연주의적인 면모는 모두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자
거부에서 비롯되었으며 체제 안과 밖에서 실천적으로 대응해 나
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그의 행동을 받치고 있던 것은 인간과
 인간의 삶에 대한 고민으로 점철된 근본주의 사상이었던 것이다.

지은이 소개
스코트 니어링

스콧 니어링은 1883년 미국 한 탄광도시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
났다.

젊은 시절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며 자본의 분배
문제를 깊이 연구했는데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에 앞장서다 해직
되었다. 그후 톨레도 대학에서 근무했으나 전쟁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주장하다 또다시 해직되었다.

1917년 반전 논문을 발표하여 스파이 혐의로 기소되어 1919년 연
방법정에 피고로 섰지만, 배심원들의 30시간에 걸친 긴 숙의 끝에
무죄판결이 내려졌다. 그러나 사회로부터 위험분자, 과격분자로
몰려 소외를 당했다.

생의 후반기로 접어든 니어링은 스무 살 연하의 매력적인 여성
헬렌 노드를 만나 새로은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처음에는 버몬트
에서 그리고 후에는 메인에서 그들은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적인
생활을 했고 겨울에 농장이 얼어붙어 농사를 지을 수 없으면 여행
을 떠나고 강연을 하고 저술을 하며 지냈다.

1983년 8월 24일 100세가 되던 해, 스콧 니어링은 부인 헬렌 니어
링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
 1백 년의 시간을 통해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진정으로
의미있고 충만한 삶이 어떤 것인지를 실천적으로 보여준 사람이었
다.
Posted by 장돌

노먼 베쑨

열정적 인물 2007. 11. 12.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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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먼 베쑨(Norman Bethun 1890~1939)

1890년 캐나다 온타리오주에서 출생, 1939년 중일전쟁 중 패혈증으로 젊은 나이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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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먼 베쑨. 그는 1890년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그레이븐 허스트라는 곳에서 말콤 니콜쓴 베쑨 목사와 어머니 엘리자베스 앤 굿윈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평화로운 풍경속에서 마음껏 뛰놀며 자랐고 그는 아주 총명한 아이였다.

노먼 베쑨은 그 자신이 북미의 최고 흉부외과의의 한 사람(북미의 최고라면 세계적으로도 권위가 있을테지만)이었지만 스페인 내전과 중국 혁명에 참여하였고 캐나다의 의료제도 혁신을 위해 헌신하였으며 소외된 아동들을 위한 활동에도 참여한 사람이다.
노먼베쑨은 1890년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그레이븐 허스트에서 태어났다.외과의사인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베쑨도 의과대학에 진학했고 캐나다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입대한다.그러나 전장에서 그가 본것은 참혹함이었고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는다.폐결핵에 걸려서 죽음의 문턱늘 넘나든 경험으로 의학이란 무었인가,의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하는 고민을 한다.공산당에 가입하고 혁명사상의 국제적인 실현을 위해서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고,홍군의 시체가 가득한 중국 산간 오지로 떠난다.그리고 거기서 죽음을 맞이한다.
중일전쟁이 치열했던 1939년 11월13일 중국 허베이(河北)성 스자광(石家廣)지역 산악 오지마을에서 닥터 노먼베쑨은 숨을 거뒀다. 마오쩌둥(毛澤東)은 그의 죽음은 우리에게 깊은 흔적을 남겨놓았다. 그의 무사(無私)정신은 민중에게 쓸모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우리의 출발점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우쳤다고 애도했다.


온 인류를 품어 안은 휴머니스트, 인종이나 국적에 상관없이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죽음을 무릅쓰고 생명을 구한 노먼 베쑨. 스페인 내란과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중국에서 펼친 그의 뜨거운 인류애는 전 세계인의 지지않는 꽃으로 피어났다.

 

그는 1939년 11월 13일 오전 5시 20분에 사망하였다.

그의 유언에는 섭장군에게 보내는 편지와 캐나다에 있는 친구 그리고 손문의 부인인

송경령여사가 회장으로 뉴욕에 있는 중국원호위원회 사람들에게 자신의 죽음으르 알려

달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현재 그의 묘는 베이징의 남동쪽에 있는 석가장 시의 순교자 묘지에 있다


Posted by 장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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